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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산일기

YES 2017. 6. 15. 19:00

2011년 개봉작, 영화 무산일기 

박정범 감독 작품.

 

 

 

인간에게 선을 허하라.

TV드라마 속 주인공은 늘 착하다. 그리고 주인공 주변에는 그를 괴롭히는 악랄한 악역들이 존재한다. 악행을 행한 자는 반드시 인과응보적 결론에 따라 종래에는 망한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성취하고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드라마 속 인과응보가 생경하다. 주변의 못된 사람들, 잘만 되더라. 착하게 살면? 그야말로 등쳐먹기 쉽다. 착하게 살면 손해보는 세상이다.

 

화가 난다. 전승철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다. 그는 한마디로 인간 전승철로 살고 있었다. 내 옷이 아닌 옷은 나이키라 해도 내 것이 아니다. 주눅이 든 것인지, 겸손한 것인지, 늘 불안한 듯한 눈빛의 그는 답답할 정도로 순하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다. 그것이 전승철이다. 사실 그를 두고 선한 인간이라 정의하는 것도 우습다. 때린다고 맞는 것이 착한 것인지, 좋은 옷에 욕심을 안 부리면 착한 것인지. 전승철이란 인물의 캐릭터를 단순하게 선한 인물이라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편의상 선한 인물이라 칭하자. 그 선한 인물이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왔다.

그에게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욕망은 교회에서 만난 숙영이다.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그녀를 훔쳐보고, 때로 길에서 그녀의 뒤를 밟으며 삶의 유일한 유희로 삼는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일을 구해보고자 하지만, 125란 숫자로 낙인찍힌 그의 주민번호는, 남한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도록 그를 묶었다. 수중에는 시급 2000원의 벽보 전단 붙이는 일이 전부. 사회의 속성을 내면화 하지 못한 그에게, 숙영의 노래방 아르바이트 일도 얼마 못 가 쫓겨난다. 정말 그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따스한 관심? 사랑? 얼마 못 가 잊혀질 싸구려 동정은 그에게 외려 독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치밀었던 것은, 내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나빠지면 되잖아. 거짓말도 하고 욕심도 부리고.' 경철처럼 남한에 제대로 적응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끝없이 소리쳤다. 제대로 적응한다? 무슨 의미일까. 남한 사회에의 적응이 대체 어떤 의미이기에 이토록 스스로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승철의 친구 경철 역시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넘어온 탈북자다. 그는 남한 사회에서 같은 아픔을 지닌 탈북자들에게 사기를 치며 먹고 사는 나쁜 사람이다. 그렇다. 그런 사람을 두고 대개 사람들은 악이라 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주는 사람. 그러나 그는 적어도 승철처럼 바보같이 살지는 않는다. 이방인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옷을 입고, 잠자리를 함께 하는 애인도 있다. 평범하게 살고 있다. 친구에게 비싼 나이키 점퍼도 선물하고, 훔쳐서라도 나이키 바지도 준다. 그는 정말 평범하게 보인다.

이 지점에서 남한 사회의 아이러니를 본다. 선악의 구분이 아무리 모호한 것이라 해도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고 사는 경철은 악이며, 거지같은 순둥이 승철은 분명 선이다. 그러나 어째서 악인 경철은 평범하게 잘 살고, 선인 승철은 거지처럼 사는가. 남한 사회는 악에게 평범하게 살 기회를 제공하고, 선인에게는 거지라는 타이틀을 주었다. 정상적인 사회인가. 경철은 말이 많고 승철은 말이 없다. 악인들은 때리고 선인들은 맞는다. 악인이 되어야 나이키를 입고, 선인이 나이키를 입으면 며칠 못 가 찢긴다. 비정한 세상.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선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는 아름다운 동화를 듣고 자랐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착하게 살아서 행복해진 흥부도, 콩쥐도, 신데렐라도 없다. 세상에는 내것을 오롯이 잘 지켜내는 놀부와 팥쥐, 신데렐라의 언니들만이 정상으로 살아간다. 비단 남한으로 국한시키지 않아도 좋을 이 시대, 거짓같은 현대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배운대로 라면 우리는 선한 인간이 되어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스크린의 전승철에게 뛰어들어가 외치고 싶어 미친다. 당신도 나이키를 훔치시오. 하고.

그러나 영화가 뇌를 울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저 답답한 선인 승철도 결국은 이 사회에 정상적 악인들과 한 가지 얼굴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놀라울 것도 없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경철의 눈을 피해 강아지와 숨어버리는 승철을 볼 때, 나는 놀라움이 아닌 안도감을 느꼈다. 동질감을 느끼는 것일까. 이 사회에 정상적인 악인으로 살아가는 나는, 승철도 누군가의 돈을 부정하게 취할 수 있는 인물임을 느낄 때, 그를 괴롭히는 무뢰배들에게 돌을 들어 반격할 수 있는 인물임을 느낄 때, 나는 안도했다. 이 회색 사회의 일원 모두는 모두 같은 악인이어야 하기에.

 

승철은 변했다. 머리를 잘랐고 원하던 수트와 구두를 샀다. 말끔한 모습으로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게 되었고 노래방에서 숙영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 부정한 경철의 돈에서 정상적인 생활은 싹트기 시작했다. 이 사회에 산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것이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우리 모두는 악해져야만 한다. 악이 정상이고 선이 비정상인 사회. 우리는 선이 악이고 악이 ㄴ선인 사회를 산다. 선은 죽었다. 영화의 마지막, 승철이 아끼던 백구가 죽는다. 개 한 마리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클락션을 빵빵 울려대며 지나는 길가에, 네온 싸인이 반짝이는 화려한 밤길에서 백구는 죽어있고, 승철은 백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배고파 떠난 북한과 백구가 설 공간이 없는 남한. 그것이 현대의 지구다. 지구의 수명이 언젠가는 다한다고 하는데, 과연 이 지구의 숨이 멎는 날까지 백구의 생을, 승철의 생을 오롯하게 그대로 지켜내 줄 공간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그가 그로서 살 수 있는 곳이 없는 걸까. 제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도록 선을 허할 수 있는 공간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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