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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린 시절에 유행하던 곡의 멜로디. I'm still loving you. 추후 알게 되었지만 중화민국 홍콩 일본 중국 등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던 아시아의 가희, 등려군의 히트곡이었다고. 우리에게는 MBC 주말연속극이었던 [사랑해 당신을]의 OST로 더 유명한 곡이었다. 오랜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마도 당시만 해도 젊디 젊었던 감우성이 남자 선생님 역이었고 철없이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여고생 역에 채림이 출연했었다.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푹 빠져 보았던 드라마. (지금 관점에서는 선생님과 학생이 졸업 직후 결혼이라니 사회적으로도 논란이 될 수 있는 소재인 듯) .

국내에 영화 첨밀밀이 소개된 후 큰 인기를 끌었던 등려군의 첨밀밀이 인기였기는 했나보다. 어릴 때라 그 시대 분위기까진 알지 못하지만 워낙 익숙하니 번안곡까지 드라마 OST에 넣었겠지.

 

사족이 길었지만 본론으로 들어가 첨밀밀 이야기부터.

첨밀밀에는 다양한 양상의 사랑이 등장하는데, 상업영화치고 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사랑의 유형과 정의에 대해 쉽게 단언할 수 없게 하는 여러 커플들. 영화를 참 여러번도 봤지만 여전히 어떤 것이 사랑이고 어떤 것은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없고, 볼 때마다 달리보이는 신비한 영화.

 

우선 첨밀밀은, 소군과 이교 두 사람이 서사의 중심이다. 산업화 도시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홍콩에 온, 두 사람의 이야기.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가까워지지만 서로가 추구해온 삶의 방향을 따르며 헤어지게 되고 결국은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 어찌보면 진부하고 또 어찌보면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이야기 사이사이에 녹아든 주변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영화에 푹 빠져버리고 만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군은 고모인 Rosie의 창녀촌에서 얹혀 사는 가난한 청년이다. 친구도 없고 영어도 광동어도 서툰 뜨내기지만, 첨차 도시의 삶에 적응해가는 착한 청년이다. 서사의 중심은 이 소군의 내레이션인데, 고향에 두고온 애인인 소정에게 편지를 써 읽어내려가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그 때만 해도 흔한 연애수단이었던 "편지". 빨간 우체통에 연인인 소정에게 편지를 부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어느 날 소군은 맥도날드에 들른다. 맥도날드는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로, 패스트푸드 점이 없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소군은 맥도날드의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계산 법도 매장 분위기도 모조리 신기할 따름인 소군. 반면 맥도날드에서 새침떼기 마냥 아르바이트 중인 이교는, 그런 소군이 바보같이 보인다. 영어도 광동어도 기본적으로 쓸줄 아는 듯 보이고, 돈 계산 하는 법, 햄버거 주문하는 법 등 도시의 삶에 관한 건 모르는 게 없는 듯 똑부러지게 보이는 이교. 그런 이교도 사실은 소군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이방인이다.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소군은, 영어를 배워야한다는 이교의 말에 당장 영어학원에 등록한다. (이교가 학생을 한 명씩 등록시킬 때마다 학원에서는 일정 수당을 이교에게 지급하고 있었다. 요즘말로 브로커라고 이해하면 편할 듯) 맥도날드의 테이블매트마저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기 좋겠다며 챙겨가는 순진한 소군에게, 이교는 그야말로 세련된 여성의 전형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교는 바빴다. 단순히 맥도날드 알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군이 다니는 영어학원에서 청소도 했고 꽃집에서도 파트타이머로 일했다. 쉴 새 없이 일하는 그녀는, 엄마에게 집을 사주고 싶다는 꿈을 가진, 평범한 처녀였다. 바쁘게 사는 그녀에게 어느 날, 소군이 차를 태워주겠다 했지만 사실 알고보니 그건 자전거. 실망한 듯한 그녀였지만 이내 소군의 뒤에 올라탔고, 그들은 홍콩 침사추이 거리를 함께 달리며 등려군의 노래를 불렀다. 점차 가까워지는 도시의 이방인들. 외로움 속에 서로가 느낀 친밀함으로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잘 보여준 장면은,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씬들이었다. 커다란 사건을 겪는 건 아니었지만 영화는 함께 열심히 일한 돈을 모으고,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함께 걷고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이 가까워짐을 보여준다. 특히 가구 가게 앞을 지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는데 그 장면이 꽤 예쁘게 기억된다.

 

어느날 연말을 맞아 함께 등려군의 테잎을 팔러 나온 두 사람은 크게 성공할 거라 생각했지만, 홍콩 사람들은 등려군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한다. 크게 손해를 본 두 사람은 속상한 마음에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소군은 이교도 지방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본인과 다르게 모든 면이 똑 부러지는 그녀 역시 자신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평범한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소군은, 이교를 더욱 친밀하게 생각하게 된다. 새해 첫 날, 함께 떡국을 먹던 두 사람은 갑자기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단추를 채워주던 소군이 이교의 눈을 바라본 순간 파파파파팟 스파크 튀더니 결국 친구였던 둘은 연인이 되고만다. 이튿날 묘한 미소의 이교. 등려군 테잎을 사서 값싸게 넘기느라 손해를 많이 본 이교에게, 소군은 절반의 손해를 보전해주겠노라 하지만, 이교는 투자에 따른 실패도 자신의 몫이라며 거절한다. 연인이 아닌 친구로서의 거리감, 딱  그만큼만 소군에게 허락하는 이교의 눈빛. 친구로서 서로를 응원하며, 이교도 소군도 친구라는 명칭 뒤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만다.

 

그러나 외로운 남녀가 어찌 큰 도시에서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더구나 새 해 첫날 분명 한 침대에서 밤을 보냈거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여관을 들락거리는 사이가 된 두 사람. 그러다 마주친 커플이 있었으니 바로, 영어학원 강사인 제레미와 창녀인 개란이다. 그 둘의 조합도 꽤나 묘하다. 한 사람은 학원 강사요 한 사람은 창녀.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절반 이상이 욕이고, 평소에 술독에 빠져 사는 남자. 제레미의 존재 자체, 삶 자체도 아이러니가 가득한데, 그가 사랑하는 여자마저도 마찬가지다. 성을 파는 여자와 성을 나누는 남자. 두 사람의 결합은 묘한 구석이 있다.

 

소군은 이교와 가까워질 수록 고향의 소정에서 점점 편지쓰기가 어려워진다. 소군은 주방 보조일도 어느 덧 많이 익숙해졌고 도시생활에 적응해버렸다. 그럴수록 소정과 결혼하겠다던 과거의 꿈은 점차 멀어져만 간다. 그러던 어느날 이교가 주식투자에 실패하고, 손해를 메우기 위해 시급이 높은 일을 헤매다보니 결국 안마시술소에까지 흘러들게 된다. 거기서 이교는 증지위가 연기한 표형을 만난다. 조직의 보스급이었던 표형이 하는 일은, 정확하게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금목걸이와 금팔찌 등 각종 장신구들로 미루어볼 때 고리대금업과 관련한 일이 아닐까 추측된다.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교에게 매력을 느낀 표형은 그녀가 좋아하는 미키마우스 문신을 등에 하고 나타나며 그녀를 웃게 해준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지쳐있던 이교에게, 소군은 소정에게 줄 팔찌와 같은 팔찌를 이교에게 선물한다. 이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혼란스러움 등으로 방황하던 이교는 소군에게 다시 연락하지 말라며 돌아가고만다. 모두가 바쁜 도심 속에서 길을 잃은 두 이방인.

 

몇 년 뒤 주방에서 자리를 잡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소군은 먼 고향의 소정을 불러 "오랜 꿈"이었던 결혼을 한다. 결혼식에서 다시 재회한 소군과 이교. 이교는 표형과의 만남을 계기로 부동산에서 큰 손으로 진화(?)했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는 신여성으로 거듭났다. 오랜만에 이교를 보자 심란해진 새신랑 소군은, 아내와 함께 누워 이런 이야기를 한다. 처음 홍콩에 왔을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고. 그 때 네가 내 곁에 있었다면..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새신부 아내는, 그저 남편이 그 시절에 자신을 많이 그리워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 생각한 듯,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잠에 빠진다. 하지만 그 순간 소군은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낮에 만난 이교를 보며, 차라리 소정과 홍콩에 처음부터 함께 정착했더라면, 이교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은 그때 그 시절 순수했던 그 모습 그대로 소정을 사랑하며 지냈을 지 모른다는 회한에 젖어 던진 혼잣말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해하는 아내도, 그런 아내를 보며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소군도 모두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인 서약을 했을 것이다. 흔한 말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를 사랑하겠노라 다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마음이란 언제나 제 마음 같이 않은 것, 소군의 마음은 여전히 이교를 향해 있었던 것일테다. 아마도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친구라 서로를 칭하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깊이 의지하며 사랑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 가요 중에도 그런 가사가 있지 않은가. 젊은 날에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 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를 사랑했구나.

 

홍콩에 이주해와 적응해가던 초창기부터 소군을 돌봐주셨던 고모 로지는 나이들고 병을 얻는다. 결혼 후 독립한 소군이었지만, 고모님을 찾아뵈며 여전히 그녀의 유일한 핏줄로서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로지는 젊은 시절 만난 배우였던 윌리엄과의 추억을 품고 사는 인물이다. 비록 창녀촌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지만, 젊은 시절 짧은 만남을 가졌던 배우 윌리엄과의 사랑을 평생토록 가슴 속에 담고 있다. 때로 우리는 "영원한 사랑"에 대해 의심을 품곤 하지만 영원이라는 의미 자체가 우스울 수 있다. 한 인간의 생애를 길어봐야 100년이라 생각했을 때 영원이라 해봐야 고작 100년이 최대치의 길이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 100년의 생을 한 번의 사랑으로 그것도 함께 하지도 않으면서 이어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 만남과 헤어짐이 너무나 쉬운 요즘 세상에, 윌리엄을 향한 고모 로지rosie의 사랑, 애정은 그야말로 신기한 것이었다. 평생을 함께 살며 곁을 지키는 것도 아닌, 스치듯 지난 인연마저도 진정한 사랑이었다며 간직해오는 그 마음. 이해가 갈 것 같으면서도 나 스스로는 막상 자신이 없기도 하다. 

 

소군의 결혼을 계기로 다시 연락하며 지내게 된 소군과 이교. 이교는 소군의 아내 소정이 무용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주기도 하고, 새로 시작한 웨딩사업을 통해 소정에게 웨딩 드레스를 입혀주기도 한다. 함께 턱시도를 입어보라며 탈의실에 밀어넣은 소군이, 함께 여관에 드나들던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속옷만 입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이교는 허물어진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아마 같은 생각을 했던 게 아닐까. 우연히 만난 등려군에게 달려가 옷에 싸인을 받는 소군. 그랬다. 소군은 그 순수한 시절, 가식없는 마음으로 등려군을 좋아했던 대륙사람 그대로 였던 것이다. 대륙에서 온 사람이 아닌 체 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광동어를 구사하던 깍쟁이 이교는, 그렇게 변함없이 순수한 소군을 보며 복잡해진다. 홍콩사람인 체 하려면 등려군을 보고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갔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소군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그 시절, 그 마음 그대로. 그런 그가 등을 보이며 떠나자 자기도 모르게 클락션을 향해 고개를 숙인 이교. 그런 이교를 돌아보며, 소군은 확신한다. 서로의 마음을. 키스를 나누고 옛날에 함께 드나들던 여관에 들른 두 사람. 모든 것이 그대로 인 것 같지만, 그대로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달라진 현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네가 보고 싶어. " 이교는 소군에게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고, 소군은 더이상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날 밤 표형에게 일이 생겨 급히 해외로 도피하게 되는데, 솔직히 상황을 말하고 정리하겠다던 이교는 표형을 따라 이국으로 떠나버리고 만다. 빗속에서 한없이 이교가 떠난 곳을 바라보며 서 있던 소군. 소군의 표정이 너무 슬퍼서 말을 잃었다. 어차피 이교는 떠나고 없었지만 소군은 소정에게 솔직히 말을 했고, 소정 역시 그를 떠나고 만다. 첨밀밀은 볼 때마다 너무 각자 다른 사람의 다른 사랑이 보여서 너무나 슬픈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내가 가장 먼저 감정을 이입했던 인물이 바로 이 소정이었다. 오래 만난 애인을 먼 타지로 보낸 경험이 있기도 했고 영원한 사랑을 맹서했던 그가 똑같이 나를 버린 경험이 있기도 해서였다. 소정을 보며 그녀가 소군에게 느꼈을 커다란 배신감과 자괴감,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녀의 잘못이 아님에도 고통받아야한다는 그 사실에 함께 괴로웠다. 그래서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소군과 이교의 관계와 감정에 처음부터 집중이 되지 않았고 그저 불륜과 같은 부정적 단어들이 먼저 떠오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먼저 만났다고해서 더 깊은 관계이고, 추후 만난 인연이라 해서 더 중한 인연일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점들을 속으로 삼키기 까지 긴 시간이 걸렸지만, 이후 다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을 통해서, 겨우 체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저, 그럴 수도 있었던 일. 그러 수 있음. 그러나 분명,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듯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소정의 마음은, 사랑 말고는 표현할 길 없었던 행복감과 대비되어 더욱 짙은 아픔이었을 것이다. 첨밀밀에 나오는 많은 사랑이야기들 중 가장 아픈 사랑이었던 소정의 사랑. 영화에서 더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꼭 소정도 좋은 사람을 만나 더 많이 사랑받으며 행복해졌길 기도하며.

 

병이 깊어진 고모 로지는 소군에게 집을 유산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런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던 소군은 놀라운 물건들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고모 로지가 윌리엄과 함께 갔던 페닌슐라 호텔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여행가서 가져오는 단순한 어매니티가 아니었다. 그와 식사하며 느꼈던 행복감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컵, 술잔 등 레스토랑의 물건들을 몰래 챙겼던 것이다. 옳은 행동이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평생을 홀로 간직하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인지, 그저 가슴 속에 담아두고 싶었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그녀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추억들도 타오르는 불길 안으로 사그러들고 말았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고모 로지의 사랑이 진짜 윌리엄과의 만남을 전제로 한 것인지 아니면 연예인에 대한 단순 동경에서 온 환상인지 정확히 서사가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고모의 사랑이 어쩌면 꿈이었거나 단순한 팬심이 만든 환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윌리엄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데이트 때 챙겨온 물건 등을 통해 그녀가 정말 윌리엄을 (잠깐이나마) 만났었음이 증명되었고, 그 짧은 사랑으로 영원같은 행복을 누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한 여성으로 눈을 감았다. 이런 로지의 사랑을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는 서로간의 사랑만이 사랑이 얼마나 편협한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너도 나를 사랑해달라는, 조건부적 사랑은 얼마나 하찮은가. 나를 떠난 당신이지만,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라.. 평범한 소유론적 사랑을 하는 나로서는 그런 로지의 사랑이 대단해보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마뜩찮은 행동에도 쉬이 이별을 고하는 요즘 세상에, 로지 고모님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첨밀밀이 그리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 중 가장 위대해 보인 사랑이 바로 이 고모님의 사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강사였던 제레미가 에이즈에 걸린 개란과 함께 떠난다며 이별을 고한다. 창녀와의 사랑. 첨밀밀에 나오는 여러 사랑의 모습들 중, 제레미와 개란의 관계는 '성을 사고파는 여성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을 수 있을까?' 하는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정면으로 답을 던진다. 강사와 창녀. 그 이상한 조합의 겉모습에는 강사와 창녀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큰 몫을 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강사는 술에 쩌든 알콜중독자이고, 창녀는 티 없이 순수하고 착한 여성이다. 영화 첨밀밀은 이렇게 아이러니한 개념들을 동일 선상에 배치하면서 우리가 가진 사랑에 대한 조건 같은 것들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다시금 보여준다. 그 착한 개란이 에이즈까지 걸리다니. 세상은 왜일이 요지경인가. 그런데 심각한 알콜중독에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영어라고는 절반이 욕설인, 무개념 강사가, 그런 그녀를 위해 그녀의 고향으로 함께 떠난다며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사랑의 힘은 어디까지인 것일까.

 

그렇게 소군의 생활을 함께 지탱해주던 모든 사람들이 홍콩을 떠나고, 결국 소군 역시 홍콩을 떠나고 만다. 그렇게 시간은 1993년. 뉴욕의 중국식당에서 일하며 다시 이방인 생활을 시작한 소군은, 예전의 천진 난만함이나 낙천적인 모습은 사라진 채, 하루하루 그저 성실히 인생을 살아낼 뿐이다. 이때 이교도 표형을 따라 각국을 돌며 도피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결국 정착하고자 하는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표형이 사온 닭을 먹으며 맛있다고 말하는 이교. 사실 그 닭은 소군이 요리한 닭이었다. 우리의 생은 이렇게 수많은 인연이 닿고 또 닿아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른채 그렇게 스쳐 지나갈 뿐.

 

이교가 코인빨래방에 빨랫감을 찾으러 간 사이, 표형은 거리에서 총을 든 10대들과 시비가 붙는다. 불법 체류자 신분일 뿐인 작은 동양인. 불량한 10대들은 그를 쏜 뒤 값비싼 시계 등만 챙겨 달아난다. 이교는 그렇게 또다시 혼자가 된다. 이교와 표형의 관계도 분명 하나의 사랑일 것이다. 비록 표형의 죽음으로 그들은 그렇게 헤어지기는 했으나, 이걸 이별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 죽음이 아니었다면 이교는 분명 표형과 계속해서 함께 살았을텐데? 소군과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고 수년만에 여관방을 다시 찾았던 날, 그녀는 분명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표형을 따라 도피한 그녀의 심리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상과 현실 정확히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마음은 소군에게 있지만, 그 도심 속 깍쟁이 처녀의 성공욕구. 그걸 버리지 못한 또 다른 자아. 그게 이교의 마음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그걸 단순한 물욕 정도로만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필요에 의해 그를 선택했지만 그녀는 분명 그의 등에 새겨진 미키마우스에 웃을 수 있었고, 단순히 돈이 많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을 주기에 그녀는 이미 "사랑"이란 감정을 경험해버리지 않았던가. 표형 역시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표형에게, 그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사랑을 느껴왔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혼자가 된 이교는 강제 추방과정에서 소군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이민국 직원들마저 따돌린 채 그를 향해 뛰지만 그런 그녀를 알리 없는 소군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또 한 번 스친 두 사람. 이 쯤되면 두 사람은 참 안 될 인연이지 않나 싶다. 그렇지만 될놈될 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안 될 사람들은 옆 집 살면서도 안 되지만 될 커플은 남극 북극에 살아도 잘 된다고 하더니, 결국 뉴욕에 가서도 만나는 인연이라니. 아마도 질긴 인연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교는 또다시 뉴욕에 남아 가이드를 하며 지냈고 소군은 여전히 주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수 년. 이교는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미국을 떠나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마음먹는다. 그렇게 미국생활을 정리하며 모든 미련을 내려놓는 순간, 등려군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거리의 전파사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기적처럼 그녀의 곁에는 소군이 서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다시 1986년. 홍콩을 향해 온 기차 안에서 긴 여정을 함께 하며 등을 맞대고 온 사람이 바로 서로였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인연은 단순한 우연이었다기엔 지나치게 자주 있었고, 그렇게 필연이 되었다. 누가 누구를 먼저 사랑했고 누구를 더 만났고, 그런 것들은 결국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서로를 그리워했고 잊지 못했고 그렇게 긴 시간을 돌고돌아 다시 서로를 향해 서 있던 두 사람. 이런 걸 보면 정말 인연은 따로 있나 싶다가도, 아 소정이나 표형은 무슨 죄인가 싶고. 생각이 참 많아지게 하는 영화가 틀림없다.

10년이었다. 그 긴 시간, 나는 그리움으로, 미안함으로 한 사람만을 추억하며 살 수 있을까. 로지 고모처럼 평생을 그릴 수 있을까. 첨밀밀의 사랑은 다양하고 넓고 깊어서, 받는 사랑밖에 할 줄 모르는 이기적은 내게 참 힘든 영화였다. 최소한 10번은 봤던 영화인데도 볼 때마다 각자 다른 인물의 삶이 보이고 또 그래서 더 평하기 어려운 영화. 상업영화지만 분명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고, 살면서 나이먹어가면서 또 다르게 보일 지 모를 영화라 생각된다. 90년대 작품이니 벌써 20여년 전 영화지만 여전히 내게는 대작이라고 생각되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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