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영화

애니멀타운

YES 2017. 6. 2. 06:26

2009년 작, Animal Town

 

속 시끄럽다. 러닝타임 내내 영화는 할 이야기가 많지 않다는 듯 건조하게 흘러갔지만, 기실 그 소름끼치는 건조함이 나를 더 속 시끄럽게 만들었다. 영화관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방 속의 책도, 음악도 켜지 못했다. 어떡하지? 그렇게 끝없이 생각했다. 외면하고 싶다. 그 마음 때문일까, 정리가 어렵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이 영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것인지, 우선 그 무언가부터 찾아보기로 한다. 우선 기억의 회로를 돌려 장면, 장면을 스케치해본다. 그리고 그 무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과연 외면해도 괜찮은 것인지도.

 

사전에 보고 간 영화의 시놉시스 상, 교차되어 나타나는 두 주인공 중 한 명은 반드시 가해자, 한 명은 피해자일 것이다. 영화관 입구에서 가져온 한 장 짜리 팸플릿의 주인공 소개에는 두 인물이 있다. 울상을 짓고 있는 사람과 알 수 없는 표정의 한 사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두 인물을 보는 순간, 나는 울상을 한 사람이 피해자이고, 알 수 없는 무표정의 인물이 가해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괴로운 쪽은 피해자,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의 사이코패스는 가해자. 그런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영화 상영이 시작된 후 단 몇 분 만에 내 예상이 온전히 빗나갔음을 알았다. 울상을 짓고 있던 자가 바로 아동 성폭행범이었던 것이다. 그의 발목에 채워져있는 검은 전자발찌. 바로 그가 시놉시스 상 가해자로 설정된 그 아동 성폭행범이 분명했다.

주인공들의 이름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 성범죄자와 인쇄소 사장으로 지칭한다. 기실 처음엔 가해자와 피해자로 지칭하려 했으나 그 구분으로 인해 양산되는 또 다른 폭력성과 자체의 모호함 때문에 그만두기로 했다. 상영이 끝난 후 가장 머릿 속을 복잡하게 만든 단어가 바로 이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였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 지칭할 수 있을까. 그래도 괜찮은 걸까.

애니멀타운. 이 영화는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너무 늦게 보여준다. 그것도 갑자기, 강하게. "자 이렇습니다." 직접 설명해주는 영화도 물론 없겠지만 이 영화가 불친절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이면에 숨은 이야기들은 너무 시끄럽고 벅찬 것인데 반해, 그 화법은 너무 건조하고 조용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러닝타임 중후반에 가서야 조금씩 혼란을 준다. 그 벅찬 이야기들을 마음에 담을 준비도 못하게, 초중반 조용히 흐르다 막바지에 와서야 피할 수 없는 공포를 안겨준다. 자, 보라. 가해자를 보라. 피해자를 보라. 나는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벅찬 이야기를 던져주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 무방비 상태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공포. 살아있는 물고기를 만지지 못하는 아이에게, 제 몸보다 커다란 활어를 던져주는 느낌. 영화는 불친절하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애니멀, 누구입니까?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여러가지 사건, 사고들을 알리는 뉴스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인쇄소 사장이 식탁에서 밥을 먹고있는 동안에도 뉴스가 흐르고 있고, 폐지나 빈병을 모으러 다니는 아이도 뉴스를 본다. 언제나 우리는 사건과 사고를 내고 겪고 듣고 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뉴스를 보지만, 결국 뉴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 도시에 사는 우리들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인쇄소 사장의 가족 이야기 처럼.

인쇄소 사장이 밥먹는 씬이 처음 나왔을 때, 이미 나는 직감적으로 아내의 모습은 환영이요, 아내의 목소리는 환청이라 생각했다. 이미 가족이 파괴된 사람이란 설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식탁 위엔 한 사람을 위한 수저, 오직 밥 한 그릇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대답없는 딸을 깨우고 남편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사장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 공간에는 대화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빈소에서 절을 하는 그의 양말은 뒷부분이 헤져 살이 다 나와있다. 아내의 부재는 불친절한 방식으로, 그러나 명료하게 투영되어있다. 영화는 대사나 자막을 통해 친절하게 그가 외로운 존재라고 설명하진 않지만, 조용히 그가 늘 혼자임을 말해준다. 카메라 앵글은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그를 조용히 따라간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들의 차에 오르며 주차장을 빠져나가지만, 그는 홀로 움직인다. 그와 사람들 사이 이질감은 그렇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세피아 톤의 한겨울, 도시는 그가 외로운 사람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장치였다. 빨려들 듯 흐르는 차들과 위엄있게 서 있는 건물들. 그것들은 모두 그의 오토바이가 반대방향으로 씽씽 지나쳐버리는 이질적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외로운 존재로서의 인쇄소 사장은 이 도시의, 범죄의, 동물들의 피해자임이 명백해 보였다. 어쩌면.

그리고 한 사람, 전자 발찌를 착용한 그. 영화는 피가 거꾸로 솟을 참혹한 사건현장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의 다리에 감긴 전자발찌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존재를 드러냈다. 폐지를 줍는 소녀 주위를 서성이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성욕을 느끼는 일종의 장애가 있음을 말해준다. 성범죄자는 등장부터 매춘부와 함께였다. 성욕을 해결하는 방식마저 돈인남자. 최소한의 인간적 연민조차 사치일만큼 차가운 여성의 표정에서, 이미 그들의 성행위는 동물적 배설행위에 불과했다. 그의 이미지는 매춘부와 전자발찌에 중첩되어 "나쁜 놈"에 못 박혔다. 그는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지극히도 당연히. 긴 설명도 암시도 필요 없다. 그는 명백히 가해자다.  

 

영화는 건조한 시선으로 그들의 생활을 나열했다. 인쇄소 사장은 인쇄를 찍고 홍보전단을 만들어 거래처를 만들러 다니고 교회에도 나간다. 일이라 할 것도 없는 일들이 의미없이 일어난다. 그 의미없이 조용한 일상, 바로 피해자의 삶 처럼 보이기도 한다.  딸이 적은 듯 보이는, 가족을 생각하며 힘내란 작은 낙서. 그가 이 도시의 동물들에 의해 얼마나 큰 피해를 입고 사는지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나 영화 중반부터 그에 대한 접근은 아주 조심스럽게, 조용히 다른 각도로 다가간다. 그는 전단지 인쇄물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한 호프집에 들른다. 인쇄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호프집 여인과 달리 인쇄소 사장의 눈은 호프집 여인의 가슴에 머물러있다. 그의 눈에서 나는 성욕을 본다. 돈을 가지러 가는 여인의 뒷모습과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인쇄소 사장의 시선은, 도시인들의 성욕을 대변한다. 누가 뭐래도 자연스러운 것. 이를 탓할 수는 없다. 인간이니까. 자연스러운 거니까. 그리고 돈을 받아든다. 손에는 돈이, 머릿 속에는 性이 가득하다. 그리고 교회 집사라고 불리우는 그는 담배도 사서 피우고 술도 한 잔 해야한다. 인간이니까. 인쇄소 사정이 어려워 직원을 한 명 해고한다.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정은 사정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아내의 출산이 임박한 직원을 대신해 다른 직원을 해고했는데, 아내의 병원비 때문에 가불을 요청하는 잔류 직원의 부탁에는 No라는 대답이 나온다. 인쇄소 사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비딱해진다. 심지어 그는 교회 목사가 가족들과 함께 먹으라며 건네준 생선 한 동이를 그대로 내어버린다. 길 한 가운데서 목사의 선물을 쏟아버린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문다. 분명 그는 가족을 잃었고, 함께 나눌 가족이 없다. 그런 그는 분명 이 도시의 피해자고, 그 장면을 그의 외로움으로 치환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가족을 앗아간 것은 이 도시이므로. 그는 피해자이므로. 그러나 그 장면만큼 애매한 장면은 없다 싶다. 그가 버린 생선, 애니멀들이 무슨 죄란 말인가. 심지어 그들을 잡아올린 목사 역시 아무 죄가 없다. 선의를 베푼 것. 선의로 받은 애니멀들을, 인쇄소 사장은 흙 위에 무참히 쏟아버린다. 그의 표정에서는 박탈감 뿐 아니라 분노를 함께 읽을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또 다른 애니멀들이 죽어갔다. 죄없이. 생선이란 애니멀은 목사란 행위자에 의해 일차적으로 죽었지만 인쇄소 사장에 의해 또 한 번 죽음을 맞이한다. 이유없이 동물을 죽이고 자책없이 또 한 번 동물을 죽인다. 무서운 풍경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선, 성범죄자를 향한 접근도 조금씩 각도를 틀기 시작했다. 분명 그는 나쁜 놈이었다. 그 업으로 인해 변변찮은 직업도 구할 수 없고 한 몸 뉘일 방 한 칸 조차 궁색하다. 수도는 끊어진지 오래고 난방은 꿈도 꿀 수 없다. 철거 직전의 아파트에는 어서 방을 비우라는 관리인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형사들만이 찾는다. 그는 확실히 벌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생기는 다른 시선. 그는 누군가 찾아올 때마다 전자발찌를 찬 발목을 양말로 가리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죄를, 그 죄로 인한 이 처벌을. 무엇보다 그는 영화 상영내내 자신의 몸을 굉장히 열심히 씻는다. 매춘부가 다녀간 뒤에도 신음을 입에 물어가며 빈 병에 물을 채워 찬물로 성기를 씻어내린다. 나오지 않는 수도는 근처 학교 수돗가에 가서 빈 병에 물을 채워와야 하는 수고를 만들지만, 그는 기꺼이 그 수고로움을 감내한다. 모든 종류의 빈 병을 모아, 심지어 500리터짜리 작은 생수병까지 모아 물을 담아온다. 그리고 열심히 끓여내, 몸을 닦는다. 그는 닦아내고 싶은 것이다. 그의 현실을, 처벌들을. 죄를, 성향을, 욕구를. 그러나 현실은, 차다. 차가운 겨울의 차디찬 물만큼, 지워지지 않는 "죄"는 정기적 형사의 방문만큼 혹은 무관심한 의사의 진찰만큼 차갑고, 무섭고, 강렬하다. 그는 그저 그의 욕구와 몸과 죄를 있는 그대로 감내해야만 했다. 일한 돈도 떼이고, 더이상 공사장에서 일할 수 조차 없에 되고, 택시운전을 하게 된 순간에도 그는 끝없이 많은 양의 물을 마신다. 그렇다. 그는 정화하고 싶은 것이다. 제발, 제발 하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더러운 욕구를, 몸을, 씻어내고 싶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폐지를 줍는 소녀에게 고정되어 있다. 역시 그는 나쁜 사람이다. 또 다시 명백해졌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그 소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지점에서 나는 그를 가해자라 칭하기를 주저하기 시작했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치킨집 여주인을 바라보는 인쇄소 사장의 눈에서 분명히 읽혔던 성욕. 누구라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이 도시의 동물, 성 범죄자가 소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성욕"이라 단정할 수 없는 것이 읽히는 것인가. 저 눈빛, 과연 뭘까? 혼란스러웠다. 저 사람 지금 성적으로 흥분한 상태가 맞나? 폐지를 줍는 소녀 곁을 맴돌고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왜? 라는 부분에서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저 눈빛이 정말 짐승의 눈빛인가? 어느 순간 보면, 그저 아이가 안쓰러워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지만 정말? 그렇게 보기엔 그의 과거 행적이, 그가 끊임없이 집어삼키는 약은..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아마도 그 약은 성기능을 약화시키는 종류의 약이 아니겠는가. 그는 열심히, 꾹꾹 눌러 담아가며 참고있었다. 약도먹고 물도 마시고 열심히 박박 문질러 닦고... 그럼에도 소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성욕이라 무조건적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눈빛이 너무나 애절하고 절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의 시선이 성욕이란 결론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힘들게 참아내고 있는만큼, 더욱 강렬해질 그의 성욕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 눈빛은 무어라 표현해야 맞는 것일까. 일단 그의 눈빛을 성욕이라고 가정하자. 그 애절하다 못해 안쓰럽고 슬픈 눈이 성욕이라면, 인쇄소 사장이 치킨집 여주에게 느끼는 그 자연스런 성욕이 왜 그에게만은 이토록 슬프고 절박한 것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참아야 하는 것, 더러운 것,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 왜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지 못하는가.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굉장히 화가 났다. 그렇다면 소녀를 향한 그 추악한 요구도 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이냐!! 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두려운 영화의 진실을 맞닥들인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눈빛 앞에, 그의 절제와 억제가 반드시 행해져야만하는 도시에 살고 있음을 생각했다. 슬픈 것도 같지만 슬픈 것이라 하면 안 되는, 더러운 것이라 표현해야하는 그의 눈빛을 나는 어떤 말로도 형용하지 못했다.  그와 이 도시와 형사와 의사 그 모든 것을 떠나 오롯하게 그의 내면만을 들여다보면, 그의 욕구는 "어쩔 수 없는" 장애에 불과하다. 결국 고장난 욕구일 뿐. 그러나 그런 그의 욕구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는 순간, 이 도시는 동물들의 정글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럴 일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어떻게 그 어린 소녀에게 그런 맘을 품는 것이 자연스럽다 할 수 있는가! 도의적인 마음과 그의 눈빛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그에게 연민을 느낄 수도, 공감해줄 수도, 안타까워해줄 수도 없는 나를 더욱 몰아부친 장면은 바로 성범죄자인 그가 택시운전 중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택시 기사인 그에게 폭언을 서슴지 않는 승객을 대상으로 그는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단순화 해보면, 그는 단지 화를 참지 못해 여성 승객을 폭행하고 발가벗겨 길에 내버렸다. 옷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렸다. 그가 이 도시의 분명한 애니멀임을 다시금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는 어땠는가? 그녀 역시 또 다른 애니멀이었다. 그녀의 무절제했던 행동과 상식을 벗어난 언행. 이는 나로하여금 내 안에 꿈틀대는 악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변명일지는 모르겠으나 필자 뿐 아니라 모든 관객이 같은 심정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심지어 '저런 건 죽어야해!!!' 라는 생각까지 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건 죽어야 한다니. 그런 관념을 떠올리고 있는 나도, 이미 애니멀인 그들과 뭐가 다른가. 더욱이 그녀가 참혹한 모습으로 그에게 폭행을 당하고 내버려지는 장면이 충격적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나는 또다시 극한의 아이러니와 마주했다. 죽어도 된다고? 저렇게? 적색 피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스크린은 또 다시 묻고 있었다. 자 누가 동물이고 누가 죽일 놈인가. 

이렇게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 손가락질 하지 못하게 된 나를 두고, 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나쁜 놈, 맞아. 나쁜 놈이야! 하고 외쳐도, 울부짖는 성범죄자의 눈물에 나는 또다시 흔들렸다. 저 떨리는 손과 애타는 눈에서 나는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오랜 시간 억제해온 그의 욕망이 한 순간 폭발했다. 그 욕망을 억제시킬 권리와 억제해야할 의무는 과연 누가 만들고 부여했는가. 저 한 인간은 왜 저렇게 떨어야만 하는가. 표정없이 섬뜩한 인쇄소 사장만큼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성 장애자 역시 참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 역시 떨어야 했다. 나쁜 놈인데, 동정도 연민도 느끼면 안 되는데.... 그러나 또 그는 학교 수돗가로 간다. 열심히 씻어내고 닦아내고 문질러 내야하는 것이다. 또 그러나 그가 서 있는 학교는 그의 몸이 그토록 원하는 소녀들의 공간, 결국 욕구의 억제를 이루고자 하는 장소인 동시에, 그의 욕망이 강렬해질 수밖에 없는 극한의 아이러니를 품은 공간이었던 것이다. 학교 건물 뒤편에서 소변을 보는 그는 "죄송해요 제가 좀 급해서요..."라며 운다. 그의 다급함이 화날 정도로 슬프다. 슬플 정도로 화가 난다. 그의 배설은, 급한 것이다. 더이상의 억제는 불가능하다. 이제 이야기는 파국으로 갈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머릿 속이 복잡해서 사건의 순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사건 후 성범죄자의 자살시도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파국은 죽음이었다. 그는 집에서 튼튼한 루프를 미리 준비해 자살하고자 한다. 조용히. 마치 파국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인쇄소 사장은 진작부터 그를 발견하고 그 역시 성범죄자 주위를 맴도는데, 자살 직전 성범죄자가 폐지줍는 소녀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그는 택시 손님을 가장해 차에 오른다. 그 숨막히는 장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한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난 그들. 이제 인쇄소 사장이 아닌 절단용 칼에 의해 피해자와 가해자로 뒤집힐 운명에 놓였다. 인쇄소 사장의 행동 역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 하다. 그는 아동성범죄자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었고, 그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가를 나를 포함한 관객 모두가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시 등장하는 모호한 점은 성범죄자를 죽이려던 칼이 반대로 인쇄소 사장의 손을 찔렀다는 점이다. 주머니 속의 칼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가. 인쇄소사장은 계속해서 성범죄자의 뒤를 따르고, 그가 자살하려는 그 때, 튼튼한 루프를 끊어버리는 역할도 그 칼이 했다는 점이 더욱 역설적이다. 이 얽히고 설킨 그들의 관계 속에서, 죽이려던 칼이 살리는 칼이 되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정글만이 남았다. 죽음보다 못할 삶. 성범죄자는 마지막 순간을 선택할 권리조차 빼앗겼다. 적어도 그 찰나,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인쇄소 사장이 그 어떤 맹수보다 두려운 "애니멀"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애니멀이 될 도리밖엔 없는 곳. 그들이 살아야만 하는 곳, 바로 애니멀타운이다.

그러나 또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동물이 동물에 의해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한 채 택시에 갇혀 물을 마셔대는 끝없는 억제의 시간 가운데, 멧돼지가 성범죄자란 또 다른 동물을 죽게 만든 것이다. 아니, 죽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도시 안에 들끓는 수많은 동물들은 저 한마리 동물 죽은게 무슨 대수냐는 듯, 현장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릴 뿐.

 

끝내 이 영화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마음에 담고 있는 도덕률을 깨는 것이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성범죄는 흉악 범죄이며, 그 중에서도 아동 성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극악한 죄다. 그런 죄를 저지를 그에게 어떤 자비도 연민도 없어야만 하는데, 영화는 자꾸만 내게 물어왔다. 저 사람은 죄에 따른 벌을 다 받고 나왔어. 그래서? 이제?..... 그의 내면에 죽여야만 하는 그 흉악한 욕망은 한시적 국가적 처벌이나 정ㄱ리적 차단, 감시의 틀과 관계없이, 과거부터 미래까지 늘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그의 욕구가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기본적이고 자연스런 욕구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횡포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니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단호해질 수밖에 없는 이 민감한 문제를 왜 감독은 전면에 내세운 것일까? 감독은 구태여 이와 똑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닐 ㅜ 있지만, 내게 이 영화를 외면하고 싶게 만든 것은, 결국 당연히 나쁜 사람인 저 자식만큼, 우리 모두가 나쁜 놈일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었을까 싶다. 머리는 말한다. 잘 된 거라고. 동물이 동물을 죽여주었으니. 그러나 또 다시 겁이 나는 것은 이 모든 동물들은 계속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주고 죽이고 또 죽이고를 반복할 것이란 사실이다. 이 애니멀 타운에 살아가야하는 여기 모든 이들, 아니 동물들이 두렵다.

 

영화관에서 돌아와 하룻밤을 고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샤워 후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뒤척이다 불을 켜고 가방 안의 팸플릿을 꺼내들자, 후면 상단에 이런 카피가 적혀있었다. "우리는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지 아무도 모른 채 이 짐승 같은 도시에서 산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나마 고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왜 당연한 문제들에 대해 왜 이토록 머리 아프게 고민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언급하신 "세계관의 전복"이 이런 것일까 생각해본다. 전복되지 않기에 더 복잡한, 이 명확했던 도덕률. 이를 흔든 영화 애니멀 타운. 이 영화 정말 무섭도록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외면해도 좋은 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아무리 외면해선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두렵다. 외면밖엔는 길이 없다는 소인배다운 답을 생각한다. 싫으니까. 어찌 되었든 내 주변 만큼은 그런 장애자가 없다고 믿고 싶은 마음. 예쁘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나오는 티브이 속 이야기 처럼, 늘 세상은 아름답다고만 믿고 싶기 때문에. 그러나 오늘도 지구 구석구석에는 우리가 장애라고 이름붙인 다수와 다른 성 지향인들이 숨쉬고 있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언제나 고통 속에서. 이에 나의 '눈 가리고 아웅' 식 외면은 명분을 잃고 만다. 세상은 전연 아름답지 않으므로.

이제 답할 시간이다. 애니멀 누구입니까? 당신 그리고 내가 아닐까. 서로가 가해하고 피해입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호하게 섞인. 이 도시가 바로 애니멀 타운.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협화음  (0) 2018.01.05
무산일기  (0) 2017.06.15
첨밀밀甛蜜蜜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0) 2017.05.31
길 위의 또 다른 여행자들  (0) 2017.05.12
The fault in our stars 안녕 헤이즐  (1) 2017.05.0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