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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의 확신

YES 2018. 1. 9. 23:58

박경목 감독의 영화 <사랑의 확신>은 근래 본 영화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결말을 맺은 작품이었다. 대충의 줄거리는, 영민은 애인대행 사이트를 통해 한 여자를 만난다.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못 다해준 것들을 해주고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렇게 처음 만난 여인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사랑에 빠져버리는 영민. 그러나 그렇게 만난 신혜는 그의 사랑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끝내 성매매 혐의로 영민을 경찰에 넘기기에 이른다. 하루만에 사랑에 빠져 잠자리를 함께 하는 남녀의 모습도 흥미롭거니와 그러허게 사랑에 빠져놓고도 한 달만에 마주친 장소가 경찰서라는 설정도 참 발칙하다. 물론 구조만 놓고 보면 단순하다. 그러나 이 심플한 이야기로 영화는 복잡한 질문을 몇 가지 던진다. 이 극단적인 커플은 진짜 사랑이었을까? 이들이 하루만에 사랑을 느꼈다고 해서, 이를 사랑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치부할 수 있을까. 마지막에 영민이 연인으로서, 신혜에게 건넨 돈 봉투의 성격까지 생각하면, 이 영화가 주는 질문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들의 감정에 주목하자.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그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느낀 시간이 하루 24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점은, 그들의 감정을 사랑으로 정의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 사람들은 통상 사랑이란 표현을 쉽게 하지 않으며 그런 감정을 느끼는 데에는 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첫눈에 반한다는 표현도 존재하고있지만 대부분 외모나 첫인상에 대한 호감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사랑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진지하고 무거워진다. 통상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일반적 기준에 의하면 이들은 표면적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볼 수는 없다. 하루만에 서로에 대해 어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문제는 이런 통사엊ㄱ 기준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모호한 것인지 고려하면, 그렇게 단정하는 것도 우스워진다. 기실 서로를 잘 알아야만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서로에 대해 잘 안다 혹은 모른다 라는 자체도 구체적 지표가 없다. 따라서 사랑을 정의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서로 알아온 기간, 시간(설사 그 기간이 이들과 같은 단 하루 뿐일지라도) 역시기준이 될 수 없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모호한 단어조차 철저하게 주관적인 만큼, 그 기준을 객관적으로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일이다. '한 시간 전에 만난 그녀이지만, 그래도 그녀를 사랑해'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를 거짓으로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기껏 표현할 수 있는 정도는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해' 정도일 것이다. 결국 사랑에 대한 정의가 무한대로 가능한 것 처럼 그들의 감정이 사랑이었는가는 누구도 결코 알 수 없다.

 

이런 생각의 연장에서 그들의 감정을 사랑으로 인정하고자 할 때, 또 다시 관객은 장애물을 만난다. 그들이 만난 목적과 장소의 문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애인대행 사이트를 통해 성매매를 목적으로 만났다. 아무리 영민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다.'고 주장한다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이 선택한 마지막 데이트 코스인 모텔에 쏠려있다. 물론 그는 데이트 내내 신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녀 역시 영민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그들은 모텔로 향했고, 서로를 애인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영민이 남자친구로서 그녀에게 건넨 60만 원. 관객들에게 장애가 생겨버렸다. 애인에게 받는 용돈?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다시 상식의 선에서 멈칫하게 된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당초 만남의 시작도 성매매 사이트였었다는 점과 그들의 만남, 끌림, 사랑을 느끼는 과정이 단 하루라는 점에서 관객들은 돈과 결부된 그들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순수한가. 그 돈의 성격을 정의할 수 있는가. 잠자리 이후 영민이 건넨 돈은 진정 신혜를 걱정한 영민의 순수한 애정일 뿐일까. 그저 애인대행비일 뿐일까. 돈의 성격마저 정의할 수 없는 관객들이다. 그들이 사랑을 했든, 대행을 했든, 오롯하게 그들의 감정이며 그들의 돈을 나눈 것 뿐이다.

 

관객들이 머릿 속에 가진 보편적 연애 혹은 사랑의 성격이나 기준에 대해 영화는 끊임없이 도전한다. 그렇게 가치관의 충돌로 머릿 속이 복잡한 가운데, 강한 타격이 또 한 번 일어난다. 한 달 동안 너무 바빠 자주 보지 못한 그들. 신혜가 영민을 성매매 혐의로 고발, 경찰서에서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그들은 성매매 사이트를 통해 연락처를 주고 받은 뒤 모텔로 향했다. 성매매 혐의자로서의 조건에 부합한다. 법은 영민을 범법자로 몰고, 영민은 괴로움에 형사와 언성을 높인다. 그리고 나타난 신혜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영민을 성매매자로 지적한다. 입건된 영민은 죄인인가. 영민의 갈등은 그들의 감정이 사랑이었는가 하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법이 금지한 성매매의 영역과 맞닿아, 사법처리란 문제와도 닿아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는 사랑도 잃고 법도 어긴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을 사랑으로 정의하는 순간, 그는 범법자도 아니고, 하루만에 사랑에 빠지는 순수한 남자가 된다.

 

감정 정의 하나로, 누군가 "그것 봐. 그게 무슨 사랑이야. 발정난 것 뿐" 하고 조롱한다면 나는 외려 그를 비난하고 나설 것이다. 이유는 결말에 드러난 신혜의 표정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사법처리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영민은 스스로를 끝까지 변호하지만, 끝내 신혜와의 대질심문을 거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혐의를 인정한다. 그 순간이 중요했다. 그가 '사랑이 아니었구나..' 하고 내려놓는 순간 신혜의 얼굴은 '사랑이 아니었어?'하고 물어왔던 것이다. 그녀가 그를 고발한 이유는 미움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회사일로 바쁜 그를 원망하던 그녀는, 형사고발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끝내 영민이 성매매 혐의를 인정하는 순간,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고 만다. 그녀의 표정으로 우리는 그녀가 그를 사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엔딩 씬을 보고 있노라면, 영민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이 요지요, 신혜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사랑이었다한들 그 대상이 자신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요지였다. 만남 자체부터 영민은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다 해주지 못한 것들을 해주고 싶어 신혜를 만났다. 그렇게 하루를 쏟아냈다. 신혜의 경우 그 현실적 대상이 신혜 자신이었다 하더라도 영민이 사랑한 대상은 전 여자친구였던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무리 동상이몽이라지만 같은 일을 함께 해놓고 이 두 사람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결국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그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즉, 믿음의 여부다. 사랑, 확신 없이는 사랑이 될 수 없다. 영민이 신혜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확신이요 믿음이었다. 타인이 아무리 해도 손 댈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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