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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갑을

YES 2024. 4. 19. 03:30

 

갑을 관계라는 개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요며칠 입안에 혓바늘이 가득 돋아났다.

죽자고 덤비던 불경기의 압박이 

한순간 과로의 고통으로 뒤집혔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꾸준함, 안정감.

이런 것들과 성실히 멀어지며 불안에 익숙해져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불안을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

이건 그냥 성격이다.

 

항상 그래왔다. 

비수기에는 이 남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동동 댔고

말라버린 잔고에 금이 가기 직전이 되면

홍수나듯 쏟아지는 일에 잠식되어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됐다

 

일정치 않은 수입은 

조바심을 낳았고

거절해야하는 일을 떠안게 만들었다

무거워 버거워 그걸 인정하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렇게 된 것이

정말 이러다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인지

게으름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

 

 

 

 

 

 

 

두려웠다

다시 실패하는 것

그 조바심이 나를 부수고 말았다.

어떤 프로젝트도 놓고 싶지 않았고

어떤 일도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박살난 몸과 마음에

어떤 의지도 채울 수가 없다

이게 그 흔한 번아웃인지 태생부터 갖고 있던 게으름인지

그걸 진짜로 모르겠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렇게 비어있는 느낌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를 돌고 있다는 허탈감

용을 쓰고 소리쳐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 같은 무력감

그들이 회의에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는 동안

우리의 노력이 모두 무용한 것으로 변모하는 동안

나는 또 한꺼풀 발가벗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럴수록

그럴수록 더 강한 어조로 괜찮음을 어필해야하는 

위치라는 걸 깨닫고

그 옴짝달싹 못할 압박감에

몸이 떨려

 

 

 

 

갑이니까

을이니까

애초에 이런 관념은 어쩌다 생겨났을까

내가 갑이 되면 저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을이라서 하는 생각이 아닐까

나는 저사람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화내는 것 조차 너무나 무용해서

우는 것 조차 사치라서

밀리고 밀린 과업들에 치여 잠도 못 자는 주제에 감히 오늘의 설움을 기록하지 않으면 일출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1g이라도 털어낼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어서

열심히 끄적여보는 오랜만의 일기.

 

 

잠재적 산업스파이로서 모든 렌즈를 봉인 당한 채

얼토당토않은 말을 삼키고 돌아온 오늘

감히 "허락"도 없이 촬영현장을 돌아보고

"컨펌"도 없이 일정을 정한

우리

 

 

 

 

 

우리라는 말이 왜 힘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견디자 우리.

할 수 있다, 라는 말에 왈칵 많은 것이 쏟아지려 했지만

더 감상적이 되는 것은

모든 걸 끝낸 유월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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